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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바를라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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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바를라흐는 독일의 조각가, 판화가, 극작가이다. 그는 1870년 1월 2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베델에서 태어나 1938년 10월 24일 로스토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르누보 양식의 조각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러시아 여행을 통해 예술적 스타일을 형성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평화주의적 반전 예술 작품을 제작했다. 나치 정권의 탄압으로 작품이 "퇴폐 예술"로 몰려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마그데부르크 전몰자 기념비', '떠 있는 천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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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바를라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른스트 바를라흐
에른스트 바를라흐 자화상 (1928)
본명에른스트 하인리히 바를라흐
출생일1870년 1월 2일
출생지베델, 홀슈타인, 프로이센 왕국
사망일1938년 10월 24일
사망지로스토크, 메클렌부르크, 독일
국적독일
분야조각, 판화, 연극, 문학
사조사실주의, 표현주의
일본어 정보
레오 폰 쾨니히의 초상화
로마자 표기Ernsuto Baruraha
출생지 (일본어)슈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베델
사망지 (일본어)로스토크
한국어 정보
로마자 표기Ereneuseuteu Balleulraheu

2. 생애

1870년 1월 2일,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베델에서 태어났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그가 14세 때인 1884년에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젊은 에른스트 바를라흐


에른스트 바를라흐는 1870년 1월 2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베델에서 의사 게오르크 바를라흐(Georg Barlach, 1839–1884)와 요하나 루이제 바를라흐(Johanna Luise Barlach, 결혼 전 성씨 Vollert, 1845–1920) 사이의 네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루터교 가정에서 자랐다.[1]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1872년부터 진료소를 운영했던 멕클렌부르크의 쇤베르크에서 보냈다. 1876년 가족은 라체부르크로 이사하여 바를라흐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188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은 다시 쇤베르크로 돌아왔고, 바를라흐는 중등학교를 다녔다.

1888년부터 1891년까지 함부르크의 게베르베슐레 함부르크(직업학교)에서 수학했다. 그의 예술적 재능 덕분에 그는 1891년부터 1895년까지 드레스덴 왕립미술학교에서 조각가 로베르트 디츠의 제자로 공부를 계속했다. 이 시기에 그의 첫 주요 조각 작품인 'Die Krautpflückerin'(약초 캐는 여인)을 제작했다. 이후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1년 더 공부했으나,[2] 프랑스 예술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독일의 경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7년에 몇 달간 다시 파리에 머물며 추가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학업을 마친 후 바를라흐는 함부르크와 알토나에서 조각가로 활동하며 주로 아르누보 양식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아르누보 잡지 ''유겐트''에 삽화를 기고했으며, 도자기 조각상을 포함하여 아르누보 양식의 조각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후에는 도자기 학교에서 교사로도 일했다. 그의 첫 개인전은 1904년 베를린의 쿤스트살롱 리히트에서 열렸다.

2. 2. 러시아 여행과 표현주의

귀스트로 대성당에 걸려 있는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Schwebender Engel'' 또는 ''Güstrower Ehrenmal''


1919년 작품, 연극 ''Der Arme Vetter (가난한 사촌)'', 삽화 ''Desperate Dance'', 댈러스 미술관


초기 작품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바를라흐는 낙담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1906년, 동생 니콜라우스와 함께 8주간 러시아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형 한스를 방문했다. 이 러시아 여행은 그의 예술 세계와 스타일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험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여행 중인 1906년 8월 20일 아들 니콜라우스가 태어났는데, 바를라흐는 아이의 어머니이자 연인이었던 로사 슈바프(Rosa Schwab)와 2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아들의 양육권을 얻었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후, 화상 파울 카시러와 같은 후원자들이 생겨 그의 재정 상황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카시레르는 바를라흐의 조각 작품에 대해 고정 급여를 지급했다. 러시아에서의 경험과 경제적 안정은 그가 자신만의 표현주의 양식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인물의 얼굴과 손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신체 부분은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초기 고딕 예술 양식처럼 깊고 무거운 주름의 옷을 걸친 인물들을 목각이나 청동으로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작품들은 강렬한 감정과 영적인 황홀경에 대한 갈망을 극적인 자세로 표현했다. 그는 독일의 풍자 잡지 『심플리치시무스』에 삽화를 기고하기도 했으며, 문학 작품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1909년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0개월간 머물며 작업했고, 1910년에는 메클렌부르크의 귀스트로에 정착하여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바를라흐는 애국심에 불타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전쟁이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이러한 생각은 1914년 12월에 제작된 청동상 '복수자(Der Rächerde)' 등 그의 작품에도 반영되었다. 그가 기다리던 '새로운 예술 시대'는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직접 전쟁에 참여하면서 찾아왔다. 그는 보병으로 자원입대했으나, 3개월 복무 후 심장 질환으로 제대했다.[3] 전쟁터에서 겪은 공포는 그를 평화주의자이자 강력한 반전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후 그의 모든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반전(反戰) 예술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몇 년 동안 바를라흐는 애국적이고 열렬한 전쟁 지지자였으며, 전쟁으로부터 새로운 예술 시대를 기다렸다. 1914년 12월에 제작된 ''Der Rächer''(복수자) 조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에 대한 그의 지지는 그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그가 기다리던 '새로운 예술 시대'는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보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했을 때 찾아왔다. 3개월간 복무 후 심장 질환으로 제대했고,[3] 평화주의자이자 전쟁의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 전쟁의 공포는 그의 이후 모든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2. 4. 나치 정권의 탄압과 죽음

1928년부터 바를라흐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반전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이러한 평화주의적 입장은 당시 나치즘의 부상이라는 정치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고, 그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마그데부르크 시가 제1차 세계 대전 기념비로 의뢰한 '마그데부르크 영묘'(Magdeburger Ehrenmalde)가 있다. 시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영웅적인 독일 군인을 묘사하길 기대했지만, 바를라흐는 전쟁의 공포와 고통, 절망에 찬 군인들과 애도하는 미망인, 해골, 겁에 질린 민간인(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함)을 묘사했다. 이 작품은 친전쟁 성향의 민족주의자들과 나치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일부는 군인들이 외국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 결국 이 기념비는 1934년 철거되었으나, 바를라흐의 친구이자 비서인 베른하르트 보머가 이를 숨겨 보호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에 다시 설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를라흐에 대한 공격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학 교회에서 의뢰받은 "정신의 투사"(Der Geistkämpferde)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인본주의적, 지성적 이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으나, 나치 정권은 작품의 반전 메시지에 분노하여 1937년 작품을 철거하고 여러 조각으로 잘라버렸다. 녹여 없애려 했으나 다행히 구출되었고, 전쟁 후 수리되어 1953년 킬의 성 니콜라스 교회 외부에 설치되었다(원래의 대학 교회는 전쟁 중 파괴됨). 1959년 미국 미니애폴리스 미술관이 구입한 복제본에는 여전히 톱 자국이 남아 있다.

1936년, 바를라흐의 작품들은 카테 콜비츠와 빌헬름 렘브룩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회에서 압수되었고, 그의 남은 작품 대부분은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몰수되었다. '괴스트로 영묘'(Güstrower Ehrenmalde)와 '함부르크 영묘'(Hamburger Ehrenmalde) 등이 대표적이다. 바를라흐 자신은 조각가로서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와 뮌헨 미술 아카데미 회원 자격도 박탈당했다. 이러한 배척은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 반영되었다.[3]

1937년에는 모든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이 철거되었으며, 뮌헨에서 열린 악명 높은 '퇴폐 예술 전'에서는 그의 동상 '재회'가 공개적으로 조롱당했다. 원래는 예수토마스의 재회를 묘사했으나, 전시 당시에는 '예수요한'으로 잘못 알려졌다. 같은 해 8월에는 '괴스트로 영묘'가 철거되어 군사 목적으로 용해되었다. 현재 쾰른과 괴스트로에 있는 동상은 이후 복원된 것이다. 1938년 3월에는 '함부르크 영묘'마저 제거되었다.

이러한 나치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과 선전으로 인해 바를라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유대인이자 볼셰비키라는 거짓 낙인까지 찍혔다. 그는 결국 1938년 10월 24일 로스토크 (메클렌부르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3][6] 라체부르크 묘지에 묻혔다.

사후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고, 철거되었던 작품들도 복원되었다. 1950년에는 '함부르크 영묘'가, 1953년에는 '괴스트로 영묘'가 원래 위치에 다시 설치되었다. 하지만 복원 과정에서도 일부 시민들의 반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그데부르크 전몰자 기념비

3. 주요 작품 경향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작품 세계는 초기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으나, 1906년 러시아 여행을 기점으로 독자적인 표현주의 양식으로 발전했다. 그는 인간 내면 표현에 집중하며, 초기 고딕 예술 형식에서 영감을 받은 강렬한 형태의 목조각과 청동 조각을 주로 제작했다.

바를라흐 작품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 가난, 소외, 그리고 전쟁의 비극이었다. 그는 사회 약자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 감정을 탐구했고, 종종 종교적 모티브를 활용해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은 그의 작품 경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쟁 초기에는 국가주의적 열망을 담은 작품(복수자, 1914)도 있었으나, 참혹한 전쟁 실상을 겪은 후 강력한 반전주의자로 변모했다. 이후 그의 작품에는 전쟁의 고통과 슬픔, 평화에 대한 갈망이 깊이 새겨졌으며, 이는 전후 제작된 여러 추모비 성격의 작품들에서 잘 드러난다.

나치 정권 하에서 그의 예술은 인간적인 고뇌와 비판 정신, 반전주의 메시지 때문에 '퇴폐 예술'로 낙인찍혔다. 많은 작품이 공공장소에서 철거되고 파괴되는 등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지닌 시대 비판적 힘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성찰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3. 1. 조각



에른스트 바를라흐는 1891년부터 1895년까지 드레스덴 왕립예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하며 예술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이 시기 초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허브를 따는 여인(Die Krautpflückerin)」(1894)을 제작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의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잠시 수학했으나, 당시 독일 예술계의 무분별한 프랑스 양식 모방 경향에는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초기에는 함부르크의 도자기 공방에서 아르누보 스타일의 조각 작업을 하기도 했다.

1906년 러시아 여행은 바를라흐의 작품 세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인간의 내면, 특히 얼굴과 손의 표현에 집중하고 나머지 부분은 단순화하는 독자적인 표현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또한, 초기 고딕 예술의 영향을 받아 깊은 주름이 특징적인 목조각과 청동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화상 파울 카시러 등의 후원을 받으며 경제적 안정을 찾은 바를라흐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에는 전쟁을 통해 새로운 예술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으며, 이는 1914년 작 「복수자(Der Rächer)」와 같은 작품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직접 참전한 경험은 그를 반전주의자로 만들었고, 전쟁의 참상과 고통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 이후 바를라흐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1919)와 뮌헨 예술 아카데미(1925)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전쟁의 비극과 인간의 고뇌를 담은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특히 1927년 귀스트로 대성당에 설치된 「떠 있는 천사(Der schwebende Engel)」(또는 귀스트로 추모비)와 1929년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에 설치된 「마그데부르크 추모비(Magdeburger Ehrenmal)」는 그의 대표적인 반전 기념비 조각으로 꼽힌다. 마그데부르크 추모비는 제1차 세계 대전 전몰자를 기리기 위해 의뢰되었으나, 바를라흐는 국가주의적 영웅상을 거부하고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고통 속에서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다양한 국적의 병사들과 민간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전쟁 지지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바를라흐의 작품은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의 반전주의적이고 인간적인 주제 의식은 나치의 전체주의 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1934년 마그데부르크 추모비가 철거되었고, 1937년에는 뮌헨에서 열린 악명 높은 「퇴폐 예술 전」에 그의 작품 「재회(Das Wiedersehen)」가 실제 모티브(예수와 토마스)와 다른 '예수와 요한'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어 조롱당했다. 같은 해 귀스트로 추모비 역시 철거되어 군수 물자 확보를 위해 용해되는 비극을 겪었다. 1938년에는 함부르크 추모비마저 철거되었다. 바를라흐는 작품 활동을 금지당하고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등 극심한 박해 속에서 1938년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그의 친구이자 조각가인 베른하르트 뵈머(Bernhard Böhmer)가 나치 당원 신분을 이용하여 마그데부르크 추모비를 사들여 보호하는 등 일부 작품을 지켜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바를라흐의 예술적 명예는 회복되었으며, 철거되었던 함부르크 추모비(1950년), 귀스트로 추모비(복제품, 1953년), 마그데부르크 추모비 등이 다시 제자리에 설치되었다.

=== 주요 조각 작품 ===

연도작품명 (원어)재료/형식비고 (소장처/위치 등)
1894허브 따는 여인 (Die Krautpflückerin)초기 대표작
1907멜론 먹는 사람 (Der Melonenesser)청동
1908앉아 있는 여인 (Sitzendes Weib)뉘른베르크
1912잠자는 농부 부부 (Schlafendes Bauernpaar)로스토크
1914복수자 (Der Rächer)청동
1919어머니와 아이 (Mutter und Kind)청동
1920하나님의 변용: 신성한 거지 (Die Wandlungen Gottes: Der göttliche Bettler)
1921요하네스 로이힐린 메달 (Johannes Reuchlin)청동 메달
요하네스 로이힐린 기념 메달 앞면
1925죽음 (Der Tod)비스바덴 박물관
1926재회 (Das Wiedersehen)목재슈베린 주립 박물관, 그리스도와 도마
1927떠 있는 천사 (Der schwebende Engel) / 귀스트로 추모비 (Güstrower Ehrenmal)청동쾰른 안토니터 교회, 구스트로 대성당[7][8][9]
1928노래하는 남자 (Der singende Mann)청동뉘른베르크
1928정신의 투사 (Der Geistkämpfer)[10]
1929마그데부르크 추모비 (Magdeburger Ehrenmal)마그데부르크 대성당, 마그데부르크
1930목발을 짚은 거지 (Bettler auf Krücken)
1931함부르크 추모비 (Hamburger Ehrenmal)함부르크
1935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프리즈 (Fries der Lauschenden)목재 조각 9점함부르크 에른스트 바를라흐 하우스
1936책 읽는 사람 (Der Buchleser)슈베린



=== 작품 이미지 ===

3. 2. 판화

에른스트 바를라흐는 조각가이자 극작가였지만, 삽화 작업도 병행했다. 특히 초기에는 함부르크의 리히트 뭇츠 도자기 공방에서 주로 아르누보 스타일의 조각가로 활동하면서, 아르누보 잡지인 Jugend|유겐트deu에 삽화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풍자 잡지 심플리치시무스(Simplicissimus)에도 삽화를 제공했다.

3. 3. 희곡

연도원제한국어 제목
1917Der tote Tagde죽은 날
1919Der arme Vetterde가난한 사촌
1921Die echten Sedemundsde진짜 세데문드 가족
1924Die Sintflutde대홍수
1926Der blaue Bollde푸른 볼 경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희곡 ''Der tote Tagde''(죽은 날), ''Der arme Vetterde''(가난한 사촌) 등이 초연되었다.

4. 주요 작품



바를라흐는 조각과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다. 특히 그의 조각은 표현주의 양식을 특징으로 하며, 전쟁의 경험과 인간 내면의 고통, 종교적 성찰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는 그의 많은 작품이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철거되거나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전후 복원되어 재평가받고 있다.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1894: 「허브를 따는 여인」 (Die Krautpflückerin|deu) -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이다.
  • 1907: 「멜론 먹는 사람」 (Der Melonenesser|deu, 청동)
  • 1908: 「앉아 있는 여인」 (Sitzendes Weib|deu), 뉘른베르크
  • 1911-12: 「망각」, 아이치 현립 미술관 소장
  • 1912: 「잠자는 농부 부부」 (Schlafendes Bauernpaar|deu), 로스토크
  • 1914: 「복수자」 (Der Rächer|deu, 청동) -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전쟁을 지지하던 시기의 열정을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1917: 「죽은 날」 (Der tote Tag|deu, 희곡)
  • 1919: 「가난한 사촌」 (Der arme Vetter|deu, 희곡)
  • 1919: 「어머니와 아이」 (Mutter und Kind|deu, 청동)
  • 1920: 「하나님의 변용: 신성한 거지」 (Die Wandlungen Gottes: Der göttliche Bettler|deu, 3일째)
  • 1921: 「진짜 세데문드 가족」 (Die echten Sedemunds|deu, 희곡)
  • 1921: 「요하네스 로이힐린」 (Johannes Reuchlin|deu, 청동 메달)
  • 1924: 「대홍수」 (Die Sintflut|deu, 희곡)
  • 1925: 「죽음」 (Der Tod|deu), 비스바덴 박물관
  • 1926: 「재회」 (Das Wiedersehen|deu, 그리스도와 토마스, 목재), 슈베린 주립 박물관 - 1937년 뮌헨의 '퇴폐 예술 전'에서 '예수와 요한'이라는 잘못된 제목으로 전시되어 조롱당했다.
  • 1926: 「푸른 볼 경」 (Der blaue Boll|deu, 희곡)
  • 1927: 「떠 있는 천사」 (Der schwebende Engel|deu) 또는 「귀스트로 추모비」 (Güstrower Ehrenmal|deu, 청동), 쾰른 안토니터 교회 및 구스트로 대성당[7][8][9] - 나치 정권에 의해 철거되어 용해되었으나, 전후 복원되었다.
  • 1928: 「노래하는 남자」 (Der singende Mann|deu, 청동), 뉘른베르크
  • 1928: 「유령과 싸우는 사람/정신의 투사」 (Der Geistkämpfer|deu)[10], 킬
  • 1929: 「마그데부르크 추모비」 (Magdeburger Ehrenmal|deu),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마그데부르크 -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인해 전쟁 지지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1934년 철거되었다. 친구 베머의 노력으로 보존되어 전후 대성당에 다시 설치되었다.
  • 1930: 「목발을 짚은 거지」 (Bettler auf Krücken|deu)
  • 1931: 「함부르크 추모비」 (Hamburger Ehrenmal|deu), 함부르크 - 1938년 나치에 의해 철거되었으나, 1950년 복원되었다.
  • 1935: 「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프리즈」 (Fries der Lauschenden|deu, 목재 조각 9점), 함부르크 에른스트 바를라흐 하우스
  • 1936: 「책 읽는 사람」 (Der Buchleser|deu), 슈베린


'''작품 이미지'''

5. 평가 및 영향

전쟁이 끝난 후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명성은 높아져 많은 상을 받았다. 1919년에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1925년에는 뮌헨 예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지만, 학위나 교수직은 맡지 않았다. 희곡 「죽음의 날(Der tote Tag)」, 「불쌍한 아버지(Der arme Vatter)」 등이 처음 공연되었다. 이 시기에 조각가 베른하르트 뵈머(Bernhard Böhmer)와 그의 아내이자 역시 조각가인 마르가 뵈머(Marga Böhmer)를 알게 되었다. 베른하르트는 나중에 바를라흐의 비서이자 화상이 되었고, 나치 박해 시기에는 나치당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바를라흐의 작품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마르가 뵈머는 이후 바를라흐의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1928년 이후에도 바를라흐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반전적인 작품을 계속 만들었지만, 나치즘이 세력을 얻으면서 그의 작품은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예를 들어, 「마그데부르크 전몰자 기념비(Magdeburger Ehrenmal)」는 마그데부르크 시에서 영웅적인 독일 병사들이 국가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모습을 기대하며 의뢰했지만, 바를라흐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 병사들이 전쟁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전쟁을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결국 1934년에 철거되었다. 다른 나라에 팔릴 뻔했으나, 베른하르트 뵈머가 사들여 보호한 덕분에 전쟁 후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에 다시 설치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은 바를라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31년, 친구인 뵈머 부부가 별거하자 바를라흐는 마르가 뵈머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1936년, 카테 콜비츠, 빌헬름 레엠브룩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지만, 많은 작품이 나치 정권에 의해 압수되었다. 바를라흐는 작품 제작을 금지당했고, 예술 아카데미 회원 자격도 박탈당했다.

1937년에는 모든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이 철거되었다. 심지어 뮌헨에서 열린 「퇴폐 예술 전」에서는 그의 동상 「재회」가 공개적으로 조롱당했다. (전시 당시 제목은 「예수와 요한」이었으나, 실제로는 예수와 토마스의 재회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같은 해 8월에는 괴스트로 전몰자 기념비가 철거되어 군사 목적으로 녹여졌다. 현재 쾰른과 괴스트로에 있는 동상은 이후 복원된 것이다.

1938년 3월에는 함부르크 전몰자 기념비가 제거되었다. 그해 10월 24일, 바를라흐는 로스토크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68세였으며, 라체부르크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뉴욕에서 기념 전시회가 열렸고, 런던의 「20세기 독일 예술 전」에서는 그의 작품 9점이 전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바를라흐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1950년에는 「함부르크 전몰자 기념비」가, 1953년에는 「괴스트로 전몰자 기념비」가 복원되어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이때에도 일부 시민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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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Kunstwerke Ernst Barlachs in der Antoniterkirche Köln - Schwebender, Kruzifix II und Lehrender Christus - AntoniterCityKirche https://www.antonite[...] 2021-12-06
[9] 웹사이트 Der Schwebende - Dom zu Güstrow https://dom-guestrow[...]
[10] 웹사이트 The fighter of the Spirit statue at the Minneapolis Institute of Arts in Minnesota http://washington177[...] 2013-06-25
[11] 경매 카탈로그 Property from the Dr. Heinz F. Eichenwald Collection Christie's 2012-05-02
[12] 웹사이트 Ernst Barlach (1870–1938), Weinende Frau https://www.christie[...] 2021-07-14
[13] 웹사이트 Exceptional Results In Motion: Impressionist and Modern Art in New York https://www.christie[...] 201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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